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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살펴보는 프랑스 역사 (3) 프랑스 혁명 후 현대까지

by forfunlife 2025.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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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프랑스 역사는 학교에서도 중요하게 배우는 시기인 만큼 굵직한 사건들이 많이 있다.

절대왕정 - 프랑스혁명 - 나폴레옹의 제국 시대까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격동기를 그들은 어떻게 극복했을지 살펴보겠다.

 

5. 부르봉 왕조 (르네상스와 절대왕정, 1589년 ~ 1792년, 1814년 ~ 1830년)

프랑스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끈 왕조로, 나폴레옹과 프랑스 혁명을 거쳐 다시 왕권을 회복했다.

  • 창시자: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며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종교전쟁을 끝냈다.
  • 루이 14(태양왕): 루이 14(1643~1715)는 절대왕정을 강화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며 "프랑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 프랑스 혁명(1789): 절대왕정과 부르봉 왕조는 루이 16세 시기에 혁명으로 인해 폐지되었다.
  • 복고왕정(1814~1830):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으나, 1830년에 혁명으로 다시 몰락했다.

** 루이 14세 (1643~1715년)

루이 14(Louis XIV, 1638~1715)태양왕(Le Roi Soleil)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국왕으로, 1643년부터 1715년까지 무려 72년간 통치하며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의 통치는 절대왕정의 정점으로 평가되며,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1. 정치적 업적

  (1) 절대왕정의 확립

  • 루이 14세는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을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말로 유명한데, 이는 왕이 국가의 모든 권력의 중심이라는 그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 중앙집권화를 위해 귀족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대신 왕실 관료제를 강화했다.

  (2) 베르사유 궁전 건설

  • 루이 14세는 왕권의 상징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했다.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유럽 각국의 모델이 되었다.
  • 궁전에 귀족들을 상주시켜 중앙에서 통제함으로써 반란 가능성을 차단했다.

2. 경제적 업적

  (1) 장 바티스트 콜베르의 중상주의

  • 루이 14세는 경제정책에서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를 재정 장관으로 임명해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 강력한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군사와 외교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3. 군사적 업적

  (1) 강력한 군사력 확립

  • 루이 14세는 프랑스 군대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만들었다.
  • 전문 군사 제도를 도입하고, 군대를 중앙에서 통제했다.
  • 이를 통해 프랑스는 유럽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했다.

  (2) 확장 전쟁

  • 루이 14세는 프랑스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 네덜란드 전쟁(1672~1678): 프랑스의 북부 국경을 확장.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유럽 대전에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동맹을 성사.

4. 문화적 업적

  (1) 예술과 문화의 후원

  •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통치 기간은 프랑스 문화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 그는 **문예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를 지원하며 프랑스어와 문학의 표준화에 기여했다.
  • 궁정에서 연극, 음악, 미술을 후원하며 몰리에르(Molière), 라신(Jean Racine)과 같은 예술가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했다.

  (2) 프랑스 스타일의 확산

  •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패션과 건축 양식을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 베르사유 궁전은 유럽의 궁정 건축의 모범이 되었고, 프랑스식 정원은 각국에서 모방되었다.

5. 종교 정책

  (1) 가톨릭 강화와 낭트 칙령 철회

  • 루이 14세는 가톨릭 신앙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며 **개신교(위그노)**를 탄압했다.
  • 1598년 앙리 4세가 발효했던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685년 철회하고, 위그노의 신앙 자유를 박탈했다.
  • 이로 인해 위그노 다수는 프랑스를 떠나면서 국내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6. 한계와 부작용

  (1) 재정난

  • 루이 14세의 대규모 건설 사업(베르사유 궁전 건설)과 빈번한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의 재정은 악화되었다.
  • 그의 사후,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으며, 이는 결국 프랑스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2) 국민의 고통

  • 루이 14세의 대규모 전쟁과 경제정책은 농민과 서민 계층의 세금 부담을 증가시켰다.
  • 그의 사후, 프랑스는 국가적 불만이 높아졌고, 절대왕정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7. 루이 14세의 역사적 평가

루이 14세는 **“절대군주”**의 상징으로,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의 통치로 인한 재정난사회적 불만은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유산은 절대왕정의 영광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 프랑스 혁명 (1789~1799년)

프랑스혁명(1789~1799년)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적 전환점을 만든 사건으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했다

 

1. 프랑스혁명의 배경

  (1) 치적 배경: 절대왕정의 위기

  • 루이 16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무능한 정치가 대중의 불만을 초래했다.
  •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은 왕과 귀족이 모든 권력을 독점했으며, 국민의 정치적 참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 루이 16세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Estates-General) 소집을 결정했으나, 이것이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2) 제적 배경: 재정난과 농민의 고통

  • **7년 전쟁(1756~1763)**과 **미국 독립전쟁(1775~1783년)**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으며 국가 재정이 파탄 났다.
  • 세금은 대부분 제3신분(평민)에게 부과되었고, 귀족과 성직자(제1·2신분)는 면세 혜택을 누렸다.
  •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은 흉작과 식량난으로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3) 사회적 배경: 계급 불평등

  • 프랑스 사회는 세 계급(신분)으로 나뉘었다.
  • 계몽사상가들(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의 사상이 계급 불평등과 절대왕정을 비판하며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2. 프랑스혁명의 주요 사건

  (1) 삼부회의 소집과 테니스 코트 서약 (1789)

  • 1789 5, 루이 16세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으나, 3신분의 요구(표결 방식의 변화)를 거부했다.
  • 3신분은 독자적으로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를 결성하고, 헌법 제정을 맹세한 **테니스 코트 서약(Tennis Court Oath)**을 발표했다.

  (2) 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 7 14)

  • 군주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들에 의해 습격당하며 혁명의 상징적 시작점이 되었다.
  • 전국적으로 농민 폭동과 봉기가 확산되며 봉건제 폐지 요구가 거세졌다.

  (3) 건제 폐지와 인권선언 (1789 8)

  • 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을 발표했다.
  • 선언문은 자유, 평등, 주권 재민, 재산권 보호 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4) 가의 몰락과 공화국 수립 (1792)

  • 루이 16세가 혁명을 진압하려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 1792 9, 왕정이 폐지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선포되었다.
  • 루이 16세는 1793 1 21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5) 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 (1793~1794)

  • 급진파인 자코뱅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공안위원회를 통해 반혁명 세력을 처단했다.
  • 로베스피에르는 수천 명을 처형하며 공포정치를 이끌었으나, 결국 그 자신도 1794년 처형되었다.

  (6) 명의 종결: 나폴레옹 집권 (1799)

  • 1799,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며 프랑스혁명은 종결되었다.
  • 그는 1804년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며 1제국을 열었다.

3. 프랑스혁명의 이후 영향

  (1) 프랑스 내 변화

  • 절대왕정의 종식: 혁명으로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공화정과 입헌군주제 등이 시도되었다.
  • 봉건제 폐지: 혁명은 봉건적 특권을 철폐하고 근대적 법적 평등과 국민 주권을 확립했다.
  • 혁명 이념의 확산: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이 프랑스 전역에 퍼졌으며, 유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세계적 영향

  • 유럽 혁명의 도화선: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국민 국가와 공화정 수립을 요구하는 혁명의 촉매제가 되었다.
  • 인권 의식의 성장: 혁명의 이념은 미국,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의 독립과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 근대 민주주의의 기틀: 프랑스 혁명은 시민권, 헌법, 보통선거 등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나폴레옹 시대와의 연결

  • 혁명 후 혼란을 수습한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해 혁명의 성과를 법적으로 정리하고,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 이를 확산시켰다.
  • 혁명으로 등장한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은 이후 유럽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주도했다.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한 국가의 체제 변화에 그치지 않고, 근대 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겪은 희생과 혼란은 인류가 평등과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필연적인 대가로 여겨진다.

 

6. 나폴레옹 시대와 공화정 (근대, 1804년~1814년)

  •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발발.
  • 나폴레옹(1804~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즉위하며 제1공화국 제1제국으로 바뀌고,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라 유럽 대륙을 정복.
  •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면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남.
  •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랑스는 영토를 다시 조정받음.  
  •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세워짐.
  • 1852년: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이 시작됨.
  • 공화정 수립: 나폴레옹 몰락 이후 프랑스는 다시 왕정과 공화정을 오가며 현대적 국가로 변화했다.

 


**나폴레옹의 등장과 제국 건설 과정

1.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부상 (1789~1799)

  • 1789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
  • 그러나 혁명 이후 프랑스는 혼란과 극단적인 정치(자코뱅 공포정치 등)에 휩싸였고, 1795년에는 총재정부가 들어섰으나 무능과 부패로 국민의 신뢰를 잃음.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젊은 장군으로 혁명군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특히 **이탈리아 원정(1796~1797)**과 이집트 원정(1798~1799)**에서 군사적 명성을 쌓음.

2. 쿠데타와 제1통령 취임 (1799)

  • 1799 11 9(브뤼메르 18),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
  • 나폴레옹은 **제1통령(Consul)**이 되어 사실상 프랑스의 최고 지도자가 됨.
  • 그는 프랑스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앙집권 체제 강화, 경제 개혁(프랑스 은행 설립), 법률 정비(나폴레옹 법전 제정) 등의 개혁을 추진.

3. 황제 즉위 (1804)

  •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혁명 정신(자유, 평등, 공화정)을 존중하는 듯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을 더 확고히 하려는 욕망이 강해짐.
  • 1802년 국민투표를 통해 종신통령이 되고, 1804 12 2황제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제1제국을 선언.
  • 황제 대관식에서 교황이 관을 씌우는 전통을 깨고 자신이 직접 황제관을 쓰는 퍼포먼스를 함이는 권력은 신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쟁취한 것이라는 의미.

**왜 공화정을 외치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을까?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공화정의 가치를 옹호하는 듯했지만, 결국 황제로 즉위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 혁명의 이상보다는 질서와 안정을 중시

  • 프랑스혁명 이후 계속된 혼란(왕정 복귀 시도, 외부 국가들의 공격, 경제 불안)을 수습하려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
  • 자신이 절대적 권력을 갖지 않으면 혁명이 무너지고 프랑스가 다시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믿음.

  2. 국민의 지지

  • 혁명기 동안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자,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게 됨.
  •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황제로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국민투표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약 99% 찬성).

3. 프랑스와 유럽의 현실적인 상황

  • 주변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이 단순한 공화정 지도자로 남는다면 외교적으로 불리할 수도 있었음.
  • 황제가 됨으로써 다른 유럽 국가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하고 군사적 정복을 추진할 수 있었음.

4. 자신의 권력 욕망

  • 나폴레옹은 능력주의를 강조했지만, 동시에 강한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음.
  • 권력을 쥔 후 점점 더 독재적으로 변하며 자신이 유럽을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됨.

 

나폴레옹은 혁명 정신을 이용해 권력을 얻었지만, 프랑스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 과정에서 결국 황제가 되었다. 공화정보다는 현실적인 안정과 권력 집중을 선택한 것. 이는 결국 유럽 정복 전쟁과 몰락으로 이어지지만, 그가 남긴 법과 제도는 현대 프랑스와 유럽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7. 세계 대전 (20세기)

  • 1914-1918: 1차 세계 대전. 프랑스는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독일과 싸움. 베르됭 전투 등에서 큰 피해를 입음.
  • 1940-1944: 2차 세계 대전  독일의 침공을 받아 파리가 점령됨. 레지스탕스(저항 운동) 디골 장군의 지도하에 프랑스가 해방됨.
  • 1945: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는 유럽 복구와 재건을 위해 노력함.

8. 현대 (20세기 중반 이후)

  • 1958: 5공화국이 수립됨, 샤를 드 골이 대통령으로 선출됨.
  • 1968: 1968 5월 혁명. 학생과 노동자들이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요구함.
  • 1981: 프랑수아 미테랑이 사회당 대통령으로 취임, 프랑스 사회의 중요한 개혁이 이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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