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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살펴보는 프랑스 역사 (2) 프랑스 왕조 변천사

by forfunlife 2025.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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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간단 역사 2탄.

 

1. 메로빙거 왕조 (481 ~ 751)

클로비스 1세가 창시한 왕조로, 프랑크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 초기 통일: 클로비스는 프랑크족을 통합하고 갈리아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 왕권의 약화: 클로비스 사후, 왕국은 그의 아들들 간에 분할 통치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실질적인 권력은 귀족과 궁재(마요르 돔)에게 넘어갔다.
  • 사실상의 종말: 7세기 이후, 메로빙거 왕들은 실권을 잃고 "게으른 왕들"이라 불리며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대신 궁재들이 실질적인 통치를 담당했다.

2. 카롤링거 왕조 (751 ~ 987)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였던 피핀 3세가 왕위에 오르며 시작된 왕조로, 샤를마뉴(카를 대제)가 절정기를 이끌었다.

  • 창시자: 피핀 3세는 교황의 지지를 얻어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 샤를마뉴의 통치: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768~814)**는 유럽 대부분을 정복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초석을 세웠다. 그는 학문과 문화를 진흥시키며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 쇠퇴와 분열: 샤를마뉴 사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왕국이 여러 부분으로 나뉘었다. 특히 843베르됭 조약으로 카를 대제의 제국이 서프랑크, 동프랑크, 롬바르디아 3국으로 쪼개졌다. 서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프랑스로 발전하였다.
  • 마지막 왕: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이 5세가 987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면서 카롤링거 왕조는 끝났다.

3. 카페 왕조 (중세, 987 ~ 1328)

프랑스의 중앙집권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왕조로, 프랑스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 창시자: 위그 카페 987년에 왕위에 오르며 왕조가 시작되었다.
  • 초기 통치: 초창기 카페 왕조는 왕권이 약했으며, 프랑스 대부분은 강력한 지방 귀족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 중앙집권화: 12세기 이후,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필리프 2(1180~1223)**는 영토 확장과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 영국과의 대립: 이 시기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이 영토 문제로 대립하며, 이는 후일 백년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 영국과의 영토 문제: 잉글랜드 헨리 2세 국왕은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 내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헨리 2세는 프랑스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인 노르망디, 브르타뉴, 앙주, 기엔(아키텐 공국) 등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의 봉신으로 간주되었지만, 사실상 프랑스 국왕보다 더 큰 영토를 지닌 강력한 군주였다. 이는 프랑스 국왕과의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백년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 마지막 왕: 1328년에 샤를 4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는 단절되었다.

4. 발루아 왕조 (중세, 1328 ~ 1589)

카페 왕조의 분가로, 백년전쟁과 종교전쟁 등 격동기를 거쳤다.

  • 창시자: 카페 왕조의 방계인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르며 시작되었다.
  • 백년전쟁(1337~1453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왕위 계승 문제와 영토 분쟁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다.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며 왕국이 재건되었다.
  • 종교전쟁(16세기): 16세기 후반에는 가톨릭과 신교(위그노) 간의 종교전쟁이 벌어졌으며, 왕권이 약화되었다.
  • 마지막 왕: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당하면서 발루아 왕조가 끝났다.

 

** 백년전쟁 영토분쟁 & 왕위 계승 문제 (1337~1453년)

  • 1328, 프랑스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4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 샤를 4세의 조카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는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이사벨)라는 점을 근거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은 여성 계통을 통한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카페 왕조의 방계인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를 왕으로 세웠다.
  •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갈등이 격화되었다.
  • 1337: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의 기엔 영토를 몰수하려 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이를 구실로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 전쟁은 초기에는 잉글랜드의 연속적인 승리로 진행되었다. 특히 잉글랜드는 **크레시 전투(1346)**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 프랑스의 승리: 1453년 보르도 전투 이후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영토를 거의 모두 잃고,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에는 잔 다르크의 역할이 컸지만, 그녀는 결국 잉글랜드 군인에 붙잡혀 이단으로 몰려 화형 당했다. 
  • 프랑스의 중앙집권 강화: 왕권이 강화되며 근대적 국가로 성장했다.
  • 잉글랜드의 내적 변화: 전쟁 이후 잉글랜드는 국내의 혼란(장미전쟁)으로 인해 대륙 문제에서 손을 뗐다.
  • 민족적 정체성 강화: 전쟁을 통해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 민족적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 종교전쟁 (1562년~1598년)

프랑스 종교전쟁은 가톨릭교도와 신교도(주로 위그노)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정치적·경제적·종교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전쟁은 프랑스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며 절대왕정으로의 길을 열었다.

 

(1) 종교전쟁의 배경

  • 종교개혁: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칼뱅주의가 퍼지며 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s)**가 급격히 증가했다.
  • 위그노의 세력 확대: 위그노는 특히 도시 상인, 귀족, 일부 농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들은 기존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 왕권 약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말기에 왕권이 약화되면서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일부 귀족은 위그노를 지지하며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 권력 싸움: 가톨릭 측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기즈 가문과 신교도 귀족들이 대립하며, 종교 갈등이 정치적 대립으로 확대되었다.
  • 경제적 문제: 16세기 프랑스는 농업 위기와 도시 경제 불안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이 종교 갈등으로 이어졌다.
  • 지방 자치의 갈등: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왕실과 지방 귀족들 간의 갈등도 종교전쟁의 한 요인이었다.

(2) 종교전쟁의 발발 및 주요 사건

    • 1562년 종교전쟁은 바시 학살로 시작되었다. 기즈 가문이 바시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들을 학살하며 본격적인 내전으로 번졌다.
    • 세인트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년):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화해를 위해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와 위그노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훗날 앙리 4)**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결혼 직후, 가톨릭 세력이 위그노 지도부를 급습하며 수천 명의 위그노가 학살당했다. 이는 갈등을 극대화시켰다.
    • 3 앙리의 전쟁(1585년~1589년): 프랑스 왕 앙리 3, 기즈 공작 앙리, 앙리 드 나바르 간의 삼파 대립이 전개되었다. 기즈 공작은 가톨릭 강경파를 대표하며 왕권에 도전했고, 앙리 드 나바르는 위그노를 이끌었다. 1589년 앙리 3세와 기즈 공작이 암살당하며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를 계승했다.

(3) 앙리 4세와 종교전쟁의 종식

  • 앙리 드 나바르는 1589년 프랑스 왕위에 올라 앙리 4세가 되었다.
  • 가톨릭으로 개종(1593년): “파리는 미사보다 가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앙리 4세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낭트 칙령(1598년): 앙리 4세는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와 일정한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며 종교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냈다.

5. 부르봉 왕조 (르네상스와 절대왕정, 1589 ~ 1792, 1814 ~ 1830)

프랑스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끈 왕조로, 나폴레옹과 프랑스혁명을 거쳐 다시 왕권을 회복했다.

  • 창시자: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며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종교전쟁을 끝냈다.
  • 루이 14(태양왕): 루이 14(1643~1715)는 절대왕정을 강화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며 "프랑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 프랑스 혁명(1789): 절대왕정과 부르봉 왕조는 루이 16세 시기에 혁명으로 인해 폐지되었다.
  • 복고왕정(1814~1830):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으나, 1830년에 혁명으로 다시 몰락했다.

 

부르봉 왕조 이후의 프랑스 역사는 역동적이고 학교 세계사 시간에도 다루는 내용이 많으므로 다음 포스팅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겠다.

중세시대 프랑스 역사는 백년전쟁과 종교 전쟁을 제대로 알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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